맨위로가기

이윤영 (1890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윤영은 1890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 정치인이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며, 이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민주당에서 활동했으며,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 연장 반대 투쟁을 벌였으며,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목회와 강연 활동에 전념하다 1975년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사회부 장관 - 허정
    허정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 교통부 장관, 사회부 장관, 서울특별시장 등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로, 4·19 혁명 후 대통령 권한대행 및 국무총리를 지내며 제2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 대한민국의 사회부 장관 - 전진한
    전진한은 일제강점기 협동조합 운동을 펼치다 해방 후 대한노총 위원장, 5선 국회의원, 초대 사회부 장관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노동 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 조선민주당 당원 - 전영택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개신교 목사인 전영택은 1919년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화수분〉, 〈소〉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개신교 관련 간행물 발행, 중앙신학교 및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문인협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 조선민주당 당원 - 조만식
    조만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민족주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간디의 비폭력 저항 사상에 영향을 받아 실력 양성 운동에 참여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나, 한국 전쟁 중 처형되었다.
  • 단양 이씨 - 이영돈
    이영돈은 고려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받고 KBS, SBS, 채널A 등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 등 다수의 시사 및 교양 프로그램을 연출 및 진행하며 한국방송대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한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방송 프로듀서이다.
  • 단양 이씨 - 이우근
    이우근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 법원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변호사로, 법원 내부 통신망에 '부패의 향기'라는 글을 남겨 사회에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
이윤영 (1890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윤영
이름이윤영
한자李允榮
로마자 표기I Yun-yeong
매큔-라이샤워 표기Yi Yunyŏng
출생일1890년 8월 19일
출생지영변, 평안도, 조선
사망일1975년 10월 15일
사망지서울특별시, 대한민국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배우자이마대
자녀2남 6녀
본관단양
학력
학교평양 숭실사범전문학교 전문학사
학교경성 감리교신학교 전문학사
정치 경력
직책국무총리 서리
임기 시작1952년 4월 24일
임기 종료1952년 5월 6일
대통령이승만
전임자장면
후임자장택상
직책무임소 장관
직책제2대 사회부 장관
임기 시작1948년 12월 24일
임기 종료1950년 11월 23일
대통령이승만
총리이범석
부통령이시영
차관오종식 사회부 차관
차관최창순 사회부 차관
정당
소속 정당무소속
정당조선민주당 최고위원 겸 당무위원
정당조선민주당 국회의원
정당국민의 당 최고위원 겸 당무위원
기타
친인척5촌 조카 이범석(개신교 목사)
아버지이용필

2. 생애

이윤영은 1890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나 한학과 근대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초기에는 교사로 활동하다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평안남도 순천 지역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되어 복역했다. 출옥 후에는 감리교회 목회자로 활동하며 일제 강점기 말기 신사 참배 강요에 반대하는 등 민족적 입장을 견지했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평양에서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소련군 진주와 공산주의 세력의 강화, 신탁통치 문제 등으로 인해 1946년 월남했다. 서울에서 조선민주당을 재건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했으며, 1948년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제1공화국에서 초대 국무총리 서리로 네 차례 지명되었으나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고, 무임소 장관과 사회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사회부 장관으로 재임했으며,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설립에도 참여했다. 두 차례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에는 군사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1963년 박정희의 군정 연장 시도에 반대하는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윤보선, 허정 등과 함께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군정 종식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목회와 강연 활동을 이어갔으며, 국토통일원 고문 등으로 활동하다 1975년 별세했다.

2. 1. 생애 초반

이윤영은 1890년 8월 19일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면 서부동 60번지에서 이용필(李龍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교육열 덕분에 7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14] 1896년부터 1905년까지 한학을 수학하여, 1901년에는 12세의 나이로 사서삼경을 독파했다. 1905년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영변 숭덕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4년 첫 결혼을 했다.[15] 당시 전쟁의 영향으로 조혼 풍습이 늘어나 여러 곳에서 중매가 들어왔다고 한다.[16] 이때 신부의 집에서 약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17]

1907년 숭덕중학교를 졸업한 후, 사촌형 이윤선과 함께 측량 기술을 배우기 위해 경성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경성 중앙YMCA영어학교에 입학했다. 1908년 이 학교를 중퇴하고, 1909년에는 경성공업전습소(훗날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토지측량법을 배웠으나 이마저도 중퇴했다. 1910년 평양숭실사범전문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여 선교사 모리스에게 영어를 배웠다.

1911년 태천 창명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었다. 창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메이지 천황의 사망 소식이 조선에 전해졌을 때, 그는 메이지 천황의 빈소에 절하기를 거부했다. 이 일로 태천경찰서로 연행되어 신문을 받고 풀려났으며, 이후 조선총독부의 요시찰 인물 명단에 오르고 '불령선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1912년 숭실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는 운산보통학교 교장을 지냈다. 같은 해 12월 교장직을 그만두고 1914년 3월 다시 상경하여, 1915년부터 1917년까지 경성 감리교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17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해 전도사로 강연 활동을 하다가 개척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17년 2월 18일, 본부인이 장질부사로 사망했다.[18] 슬하에 아들 경, 훈, 찬, 준과 딸 옥순을 두었다. 같은 해 9월 13일, 서울 신학교 동창인 배형식 목사의 중매로[19] 진남포 교회에서 이마대와 재혼했다.[20] 이마대는 진남포 출신으로 평양숭의여자중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으며, 기독교인(권사)이었다. 이마대와의 사이에서는 2남 6녀를 두었다.

2. 2. 독립 운동 참여와 목회 활동

1919년 3·1 운동 당시 평안남도 순천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1년 2개월간 복역했다. 1920년 출옥 후에는 배천, 진남포, 개성 등지에서 감리교회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는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1934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부임했으며, 1936년에는 독립운동가 정일형이태영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다.[1][2] 1940년대에는 한일기독교통합예비회담에 한국 측 대표로 참석하여 기독교 통합에 반대하다가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목사 자격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2. 2. 1. 3.1 운동 참여와 수감

1919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일신보통학교장으로 교회 일을 겸하던 중 3·1 운동에 참여했다.[21] 그는 황경환(신창금융조합 이사), 유경운, 김삼봉(신창면장), 김찬수, 이수홍, 오신길, 함태호, 이대근, 김권유, 강경심(여자 전도사) 등 동지들을 모아 3월 5일 신창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비록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순천 인근 신창읍에서 독립선언 강연회를 열고 시위운동을 이끌었다.

시가 행진 중 주동자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고, 1년 2개월간 복역한 뒤 1920년에 출옥했다. 체포 당시 임신 6개월이었던 그의 아내 이마대 역시 함께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다. 학교에서 교사로 애국가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구타당해 하혈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22]

이윤영은 체포 후 신창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평양 재판소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평양형무소 778호실에 수감되었으며, 1919년 5월 1차 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했으나, 복심에서도 1년 6개월 형이 확정되었다.[23] 옥중에서는 다른 독립운동가 및 일반 수감자들과 함께 지냈다. 수감 중 아버지 이용필과 백부가 장질부사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하기도 했다. 감옥 생활 중 부인 이마대가 넣어준 사식의 일부를 옆방에 수감된 이수홍 노인에게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24] 1920년 출감 후에는 배천, 진남포, 개성 등지에서 감리교회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2. 2. 2. 목회 활동

1920년 평양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이윤영은 배천, 진남포, 개성 등지에서 감리교회 목회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1928년에는 선교사 문요한의 추천으로 진남포 신흥감리교회 담임목사 겸 진남포 지방감리사로 초빙되어 4년간 시무했다. 목회 활동 외에도 교육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희천 대성학교 교사, 춘천 창명학교 교장, 운산 광동학교 교장, 순천 일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또한 미국 남감리교회의 감리사로 임명되어 진남포, 개성, 평양 지방 감리사로도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는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는 그의 민족적 신념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1934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정일형의 가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1936년 12월 26일 평양 정의여자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정일형이태영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다.[1] 당시 결혼 축사는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했다.[2]

2. 3.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후, 평양에서 조만식 등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및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군 진주 이후 공산주의 세력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지자, 1946년 2월 동지들과 함께 월남하였다. 서울에 정착한 뒤에는 조선민주당을 재건하고 이승만, 김구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우익 진영의 주요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2. 3. 1. 해방 직후의 정치 활동

1945년 8·15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지부에 참여하였고, 조만식(曺晩植)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양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5년 10월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 진주하면서 공산주의 진영과의 마찰이 심화되었다. 특히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결의를 서울(당시 경성)로 보낸 것이 문제가 되어, 1946년 2월 한근조(韓根祖) 등 다른 조선민주당 당원들과 함께 월남하였다.[3] 이때 여러 기독교인들을 이끌고 남하하였으나, 김길수(金吉洙) 목사는 평양 잔류를 택했다가 1949년 실종되었다.

월남 후 초기에는 거처가 없어 미국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선교사 자택에서 생활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이승만 박사의 주선으로 서울 회현동에 있는 적산 가옥 한 채를 불하받아 대금을 지불하고 거주하였다.[30] 이후 종로구 필운동을 거쳐 성동구 신당동 432-9번지로 이사하여 계속 살았다.

남한에서는 조선민주당을 재건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점차 반(反) 이승만 노선을 걷게 된 한근조와는 정치적으로 결별하였다.

1946년 1월에는 김구, 조소앙, 김성수, 이승만 등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같은 해 8월 12일에는 민족통일총본부의 정경부장으로 선출되었고, 12월 7일에는 서울 성동구에서 신익희, 박종화 등과 함께 UN에 외교사절을 파견할 것을 결의하는 대회에 참여하여 직접 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1947년 1월 26일에는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여 지도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2월에는 UN한국위원회의 파견을 맞이할 조선민족대표단 의장단의 일원으로 위촉되었다.

2. 3.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참여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3] 5월 25일 국회 개원준비위원회 서무부장에 선임되었고,[31] 5월 31일 열린 제헌 국회 개원식에서는 임시 의장 이승만의 요청으로 연단에 올라 대한민국 국회의 개원을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이는 대한민국 국회 속기록에 기록되었다.

6월 1일 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고,[31] 다음 날인 6월 2일에는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32] 6월 21일까지 헌법기초위원회 회의에 참여하며 헌법 제정 과정에 기여했다.

1948년 7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국무총리 서리로 지명되었으나, 국회 내 한민당 계열의 반대로 인준안이 부결되었다. 이후 제1공화국 기간 동안 총 네 차례 국무총리 서리로 지명되었으나 모두 국회 인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세 번째 지명 당시 민국당 측에서 내무부 장관 자리를 요구하며 인준 협조를 제안했으나, 이윤영은 이를 거절했다.[35] 또한 국무총리 인준을 위해 주변에서 1억 환의 정치자금을 가져왔으나, "나더러 벼슬을 돈 주고 사란 말이냐? 나는 너희를 이런 식으로 교육하지 않았다"며 그 돈을 되돌려주게 하였다.[35] 거듭된 인준 부결에 이승만 대통령은 영국의 유명한 수상이 7번 부결된 후 명재상이 되었다며 그를 위로하기도 했다.[35]

국무총리 인준은 무산되었지만, 1948년 8월 초대 내각의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되어 입각하였다. 같은 해 10월 6일부터 시작된 제1차 한미 경제원조회담에 재무부 장관 김도연, 기획처장 이순탁, 법제처장 유진오 등과 함께 참여했다. 협상 중 10월 12일, 미국 원조의 조건으로 포함된 '한국 정부 지도감독' 조항이 내정간섭이라며 삭제를 강력히 요구하여 관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1950년 1월 9일 대한학생정구연맹 고문에 위촉되었으며, 같은 해 5월 12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언론에 발표했다.[33][34] 이후 무임소 장관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제2대 사회부 장관을 지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사회부 장관으로서 직접 전선을 시찰하기도 했다. 1952년 다시 무임소 장관이 되었다.

1952년 3월, 제3대 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7월 13일 조선민주당 중앙상무집행위원회는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윤영을 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했다.[36] 그러나 8월 5일 치러진 선거에서 458,583표를 얻어 5위에 그쳐 낙선하였다. 선거 당시 어느 지역의 지방 경찰이 그의 선거 벽보 사진에 먹으로 그어버리다가 시민에게 발각되기도 했다.[37] 이후 무임소 장관직을 계속 수행하다가 은퇴하였다.

2. 3. 3. 6.25 전쟁 이후 활동

한국 전쟁 중에는 제2대 사회부 장관으로서 직접 전선을 시찰하기도 하였다.[35] 1951년 1.4 후퇴 때는 가족들을 먼저 피난시키고 자신도 남하하여 잠시 부산 동광동에 머물렀다.

1952년 다시 무임소 장관이 되었고, 국무총리 서리로도 임명되었으나 국회 인준을 받지 못하고 부결되었다. 세 번째 총리 서리 추천 당시, 민국당은 내무부 장관 자리를 요구하며 인준 동의를 제안했지만 이윤영은 이를 거절하였다.[35] 또한 총리 인준을 위해 정치자금이 필요하다는 주변의 권유와 함께 1억 환의 자금이 마련되었으나, "나더러 벼슬을 돈 주고 사란 말이냐? 나는 너희를 이런 식으로 교육하지 않았다"며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돌려보내게 하였다.[35] 거듭된 부결에 이승만 대통령영국의 유명한 수상이 7번 부결된 후 명재상이 되었다며 그를 위로하기도 하였다.[35]

1952년 7월 13일 조선민주당 중앙상무집행위원회는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윤영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36] 같은 해 8월 5일 치러진 제3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458,583표를 얻어 5위로 낙선하였다. 당시 일부 지역 경찰이 그의 선거 벽보 사진을 훼손하다 시민에게 발각되는 등 선거 과정에서의 방해 행위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37]

1.4 후퇴 직후인 1952년 몇몇 독지가들과 함께 부산 동대신동 임시 건물에서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을 개교하는 데 참여했으며, 같은 해 5월 학장에 취임하였다. 서울 환도 후에는 대학 부지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당시 농림부 장관 최규하 등에게 여러 차례 부탁하여 임업시험장 부지 일부를 불하받아 학교 부지를 확보하였다.[38] 또한 1952년 한국은행 측이 회현동 자택이 과거 은행 간부 사택이었다며 반환을 요구하자, 별다른 미련 없이 집을 돌려주었다.[39]

1952년 7월 반공통일연맹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54년 12월 11일 서울에서 열린 조선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수석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40] 1956년 3월 20일에는 제4대 대한웅변협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나([41] 1957년 8월 1일 사퇴), 같은 해 한국냉동협회 회장도 역임하였다.

1956년 제4대 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9년에는 당시 정국 상황을 우려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고자 경무대를 찾아갔으나, 이기붕의 방해로 면담이 무산되었다.[42] 대통령 면회를 거절당하자 이윤영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42]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 부통령 후보로 다시 출마한다고 밝혔다.

: 씨름판에 나가는 사람이 꼭 이기려고 나가느냐? 씨름에 져도 잠뱅이나 찢으려 나가는 거지! 이기붕이를 떨구기 위해서다.[42]

이기붕 측에서 사람을 보내 1억을 줄 테니 사퇴하고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제안하였으나, 이윤영은 이를 크게 꾸짖어 돌려보냈다.[42]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그는 낙선하였고, 이후 이기붕 세력의 견제를 받아 한동안 경무대에 출입하지 못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잠시 경무대에 출입할 수 있었으나, 곧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였다.

2. 4. 생애 후반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사정권 시기를 거치며, 그는 군부의 정치 개입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내비치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했다.[43][44] 1963년 박정희가 군정 연장을 시도하자 이에 반대하여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윤보선, 허정 등과 함께 전국적인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45][44] 이 과정에서 박정희와의 회담을 통해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서 공정한 선거를 통해 집권할 것을 조언하며, 군정 종식을 이끌어내는 데 역할을 했다.[47][44][49]

군정 종식 선언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나, 목회 활동과 강연 활동을 이어갔다. 국민의 당 최고위원,[3] 재이북부조합동경모대회 대회장,[21] 광성고등학교 종신재단이사 등으로 활동했으며, 1969년에는 국토통일원 위원, 1970년에는 고문으로 위촉되어 통일 문제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1975년 10월 15일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50] 생전 유언에 따라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51] 박정희 대통령은 조의를 표하고 장례비로 300만을 지원했다.[52]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가족 묘지에 있다.

2. 4. 1. 5.16 군사정변 전후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그는 자신의 보좌관에게 "이제 드디어 군이 정치를 맡게 되니 기가 막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김일성이 염려 보다는 나으니까[43]"라고 말하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또한 "정치를 군인에게 맡기는 것은 옳지 않으나 김일성이가 쳐들어 오는 것 보다는 낫다[44]"고 평가하기도 했다.

1962년 2월 27일, 서울 시민회관에서는 군은 군으로 돌아가고 구 정치인들은 반성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정치에 임한다는 내용의 '2.27 선서'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 전원과 구 정치인들이 참석했으며, 군 대표로는 당시 박정희 의장이, 정치인 대표로는 이윤영이 나서서 선서했다.[43] 그러나 선서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구 정치인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었고, 군부 역시 군정을 연장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구 정치인들은 군정 연장 반대 투쟁에 나섰다.[43] 같은 해 12월 17일, 박정희는 1963년 8월경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했다.

1963년 2월 18일, 박정희는 다시 성명을 통해 자신은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3월 15일,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 약 80명이 무장한 채 국가재건최고회의 청사 앞에서 군정 연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다음 날인 3월 16일 박정희는 군정을 4년간 연장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입장을 번복했다.

이에 1963년 3월 20일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가 조직되자 이윤영도 참여했다. 당시 철기 이범석은 "가장 욕심이 없고 양심적이며 선서의 대표자인 이윤영을 의장으로 모시고 투쟁하자"고 제안했고, 이윤영은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추대되었다.[45] 그는 윤보선, 허정 등과 함께 위원회를 이끌며 전국적인 반대 운동을 벌였다.[44] 상황이 심각해지자 박정희는 3자 회담을 제안했고, 이윤영은 군정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다른 한 명은 민주공화당 총재 정구영과 함께 회담에 참석했다.[46] 회담은 3월 20일 오후 5시부터 7시 50분까지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윤영은 박정희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당신이 정치를 하고 싶고 집권을 하고 싶으면 깨끗이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순수한 민간인으로서 깨끗하고 공명한 자유 분위기 속에서 선거를 통해서 하라. 그것이 가장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한다면 군정 연장이 아니라고 본다.[47]"

회담의 결론은 6일간 유보하기로 했으나,[48] 이윤영은 박정희에게 군복을 벗고 군정을 끝낸다면 돕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44] 당시 회담에 배석했던 이윤영의 비서 고기영(高琪榮)은 이때 이윤영이 박정희에게 정치적 재기의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평가했다.[44]

회담 이후, 현역 육군 대장 신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던 박정희는 군정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이윤영은 군정반대투쟁위원장으로서 박정희와 함께 군정 종식을 선언하는 선서식을 가졌다.[49] 한편, 지병 치료를 위해 딸 이인숙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려 했으나 신원 문제로 여권 발급이 지연되자, 박정희에게 직접 청원하여 여권을 발급받았다. 박정희는 미국으로 떠나는 이윤영에게 당시 '군사정권'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강했던 한국의 이미지를 개선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49]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는 1963년 4월 11일 해산했다.

2. 4. 2. 정계 은퇴 이후

정계 은퇴 후 목회 활동과 강연 활동에 전념하였다. 국민의 당 최고위원을 지냈으며,[3] 재이북부조합동경모대회 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21] 한국 전쟁 당시 피난학교였던 광성고등학교 재건에 참여한 후 종신재단이사로 봉직하였다.

1969년 국토통일원 위원에 피선되었고, 같은 해 삼선 개헌 추진 당시에는 공화당의 국민투표대책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1970년에는 국토통일원 고문에 위촉되었다.

1974년 혈압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으며, 1975년 9월 20일에는 늑막염으로 다시 입원했다 퇴원했다. 이후 1975년 10월 15일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50]

생전에 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을 유언하였다.[51] 정부에서는 국민장을 고려했으나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51]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아들 이동원(당시 국립의료원 사무국장)에게 사회장으로 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 등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장례비로 300만을 전달했다.[52]

부인 이마대는 남편 사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다가 6개월 만에 사망하여 남편 묘 옆에 합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가족 묘지에 있다. 딸 이영숙은 사회복지법인 은혜원을 설립하고 여러 사회 활동을 했으며, 사위 이범석은 외교관을 지냈다. 한편, 남양주시 별내면 용암리에는 동명이인인 조선시대 부사 이윤영의 묘소가 있다.

3. 이승만과의 관계 및 국무총리 인준 부결 과정

1948년 7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출석하여 이윤영을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했다. 이윤영은 북한에 기반을 둔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이었기에 민족 통일의 상징적 의미가 있었으나[53], 당시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했던 한민당 등의 반대로 국회 표결 결과 찬성 59표, 반대 132표로 인준안이 부결되었다.[53]

1950년 4월 3일 이범석 국무총리가 정치적인 이유로 사임하자[54]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여 국회에 승인을 요청했다.[54] 이승만은 지명에 앞서 조병옥, 신흥우, 신성모 등을 추천했으나 원내 각파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었다.[54] 그러나 4월 6일 열린 국회 표결에서 이윤영의 인준안은 재석 155명 중 찬성 68표, 반대 83표, 기권 3표로 또다시 부결되었다.[54]

1952년 10월 5일 장택상 국무총리가 사임하자[55] 이승만은 세 번째로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인준을 요청했다.[55] 이 과정에서 민국당(이윤영 본인은 회고록에 한민당으로 기록했으나, 당시에는 당명이 바뀐 상태였다) 측에서 내무부 장관 자리를 요구하며 거래를 제안했으나 이윤영은 이를 거절했다.[35] 또한 인준을 위해 정치 자금이 필요하다는 주변의 권유와 함께 1억 환의 자금이 마련되었으나, 이윤영은 "나더러 벼슬을 돈 주고 사란 말이냐? 나는 너희를 이런 식으로 교육하지 않았다"며 이를 돌려보내도록 했다.[35] 결국 세 번째 인준 시도 역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55] 이승만은 국회 인준 시까지 재무장관 백두진을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했다.[55]

거듭된 인준 부결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영국의 유명한 수상도 7번이나 부결되었지만 결국 명재상이 되었다는 말로 이윤영을 위로하기도 했다.[35] 이윤영은 국무총리 인준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무임소장관과 제2대 사회부장관을 역임하며 이승만 정부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사회부 장관으로 전선을 시찰하기도 했으며, 1952년 다시 무임소장관에 임명되어 활동하다 은퇴하였다.

4. 평가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윤치영은 이윤영에 대해 "참 점잖으신 분이었다. 이박사의 동지가 되어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걷다가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몰이해로 고생하시다 가셨으니 유감천만입니다.[42]"라고 평가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윤영 자신은 각박하게 변해가는 사회 인심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어려움이 있을 때에 친구를 아는 것이 참된 친구이다. 이러한 실례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 인심은 참새떼와 같이 곡식 알을 먹을 때는 무더기로 날아와 주워 먹고 다 먹은 뒤에는 훌쩍 날아가 버린다. 사회에서 보는 세상 인심은 의리, 도덕, 우정보다 먹을 것과, 이익, 권리 등을 보고는 모여들었다가 탐할 것이 없어진 후에는 다 가버리는 것이다."라며, 이익에 따라 쉽게 변하는 세태를 현대사회의 밉살스러운 모습으로 보았다.[56]

5. 가족 관계

1904년 처음 결혼하였으나[15], 첫 부인은 1917년 2월 18일 장질부사로 사망했다.[18] 이후 1917년 9월 13일 진남포 교회에서 이마대(李瑪大)와 재혼했다.[20] 이마대는 1895년생으로 평양 숭의여자중학교 제1회 졸업생이며, 기독교 신자로 직분은 권사였다. 이윤영 사후 6개월 뒤인 1976년 4월 사망하여 남편 묘소에 합장되었다.

정일형과는 인척 관계였는데, 부인 이마대가 정일형 어머니의 6촌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정일형은 이윤영에게 처조카뻘이 된다.[57][12] 이태영 변호사 역시 이윤영이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있을 때 교인이었으며, 이윤영이 아꼈다고 전해진다.[57][12]

'''가족 관계'''
관계이름생몰년 및 비고
아버지이용필(李龍弼)1867년 ~ 1919년
어머니성명 미상
동생이윤식(李允植)
사촌이윤선(李允善)
첫 부인성명 미상1890년? ~ 1917년 2월 18일
아들 (첫 부인 소생)이경(李璟)
아들 (첫 부인 소생)이훈(李勳)
아들 (첫 부인 소생)이찬(李燦)송도고등학교 졸업
아들 (첫 부인 소생)이준(李準)송도고등학교 졸업
딸 (첫 부인 소생)이옥순(李玉順)
재혼 부인이마대(李瑪大)1895년 ~ 1976년 4월
아들 (재혼 부인 소생)이동원(李東元)1938년 ~ 1980년, 국립의료원 사무국장 역임[51]
딸 (재혼 부인 소생)이혜숙(李惠淑)호수돈여고 졸업
딸 (재혼 부인 소생)이현숙(李賢淑)호수돈보통학교 졸업
딸 (재혼 부인 소생)이영숙(李永淑)호수돈보통학교 졸업, 사회복지법인 은혜원 원장 역임
딸 (재혼 부인 소생)이정숙(李貞淑)호수돈보통학교 졸업
딸 (재혼 부인 소생)이인숙(李仁淑)
딸 (재혼 부인 소생)이혜원(李惠媛)
사위이범석(李範錫)외교관, 외무부 장관 역임
처남이근하(李根夏)
처사촌이근식(李根植)의사


참조

[1]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2]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3] 웹사이트 이윤영 http://encykorea.aks[...]
[4] 웹사이트 대한웅변협회 역대회장 http://daihan1949.co[...] 2008-08-28
[5]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6]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7]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8]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9]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10] 서적 한국의 국무총리 연구 나남 2006
[11] 서적 한국의 국무총리 연구 나남 2006
[12]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13] 기타
[14]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15]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16]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17]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18]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19]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20]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21] 웹사이트 이윤영 - 네이트 백과사전 http://100.nate.com/[...]
[22]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23]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24]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25]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26] 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40-09-16
[27] 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41-04-11
[28] 간행물 法人組合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41-05-03
[29] 간행물 法人組合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44-09-15
[30]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31] 웹사이트 헌법기초위원회 - 네이트 백과사전 http://100.nate.com/[...]
[32] 뉴스 制憲에 迃餘曲折많았다 경향신문 1957-07-17
[33] 뉴스 現 國會議員 出馬 動態 조선일보 1950-05-12
[34] 뉴스 現議員 八割이 出馬 나머지 廿一名은 不出 경향신문 1950-05-12
[35]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1984
[36] 웹사이트 부통령 추천에 이윤영 씨 언급 수락 여부 고려 중 https://newslibrary.[...] 2019-06-03
[37]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38]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39]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40] 뉴스 最高委에 李允榮氏 朝民黨 各委員 决定 조선일보 1954-12-15
[41] 웹사이트 대한웅변협회 역대회장 http://daihan1949.co[...] 2010-07-14
[42]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43]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44]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45]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46]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47]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48]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49]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50] 뉴스 前 總理署理(전 총리서리) 李允榮(이윤영)옹 別世(별세) https://newslibrary.[...] 1975-10-16
[51]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52]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53]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54] 서적 한국의 국무총리 연구 나남 2006
[55] 서적 한국의 국무총리 연구 나남 2006
[56]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57] 서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 이윤영 198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